1982년~1988년 등번호 27번 김봉연

 

해태(기아)타이거즈에서 처음으로 등번호 27번을 사용했던 선수는 현재 국제대학교 체육학과 교수인 김봉연교수다. 선수 시절 김봉연은 골프를 연상시키는 어퍼스윙으로 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 홈런 22개를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했다.

 

김준환-김봉연-김성한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일명 "KKK"포로 불리우며 1980년대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김봉연선수에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3년 전반기를 마치고 맞이한 꿀맛같은 휴식일. 친구의 초대로 여수를 방문하던 중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친구의 부인이 사망할 만큼 큰 교통사고였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봉연선수는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으나 안면부위를 크게 다쳐 5시간 동안 무려 300바늘 이상 꼬메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초인적인 의지로 사고 44일만에 경기에 출전하였고, 그 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김봉연선수는 얼굴에 난 수술자국을 감추기 위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등번호 27번은 김봉연교수가 야구를 처음 시작했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달았던 번호로 평소 매우 애착을 가졌던 번호였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번호를 연세대 후배인 故 이호성선수에게 물려 주었다.

 

 

 

 

 

 

 

1990년~2001년 등번호 27번 故 이호성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봉연 선수에 이어 타이거즈의 27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故 이호성 선수이다. 해태시절 4번의 우승을 이끌며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 중 하나였으나, 은퇴 후 계속 된 사업실패와 사기, 채무에 시달리다 2008년 내연녀와 그녀의 딸 등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배를 받던 중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진 생략

 

 

 

 

 

 

2002년~2007년, 2009년 등번호 27번 강철민

 

타이거즈의 27번은 이호성선수 후 처음으로 타자가 아닌 투수에게 부여되었다. 고교시설 조용준과 함께 활약했던 강철민이 그 주인이다. 한양대 재학시절 최우수선수와 MVP를 수상하고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으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까지 해결했던 강철민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금액인 계약금 5억원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던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잦은 부상과 수술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하며, 2009년 LG의 김상현, 박기남과 2:1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LG에서도 어깨통증이 재발되어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해 "사이버 투수"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 그 후 LG에서 방출된 뒤 2012년 테스트를 거쳐 한화이글스에 입단했지만 올해 6월 한화에서도 방출되고 말았다. 화려했던 아마추어시절과 달리 어깨수술과 통증으로 프로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투수이다.

 

 

 

 

 

 

 

2008년 등번호 27번 호세리마

 

강철민에 이어 27번의 등번호를 사용한 타이거즈 선수는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런 쇼맨쉽으로 유명한 "리마타임" 호세 리마이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데뷔하여 휴스턴, LA, 캔자스시티 등에서 활약하며 메이저리그 통산 89승을 거둔 유명 투수였다. 2008년 5월 기아타이거즈의 용병투수로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한 리마는 7월까지 단 2개월 정도  뛰었을뿐이지만,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던 스타였다.

 

기아타이거즈 방출 이후 미국 독립리그 등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갔으나, 2010년 5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그를 기억하는 국내 팬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2009년~2013년 등번호 27번 김상현

 

호세리마 이후 타이거즈의 27번을 받은 선수는 김상현선수다. 2000년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2002년 LG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군 베리본즈"라는 별명이 말해 줄 정도로 장타력과 정확성, 힘은 인정받았으나 1군에서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2009년 FA자격으로 LG로 이적한 정성훈과 포지션이 겹치면서 박기남과 함께 기아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공교롭게도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 될 당시에도 정성훈과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2009년 자신이 입단했던 친정팀 타이거즈로 다시 돌아온 김상현은 2009년 4월 26일 열린 삼성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쏘아올리며 그 해에만 4개의 만루홈런을 터트리며 한 시즌 최다 만루홈런(4개)과 타이를 이루었다. (1999년 박재홍이 기록한 한 시즌 만루홈런 기록과 타이)

 

특히 8월에만 홈런 15개와 타점 38개를 뽑아내며 월간 최다 홈런, 최다 타점과 타이를 기록했고 김상현의 몬스터급 활약 덕분에 그 해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타이거즈는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2009년 기아타이거즈의 우승은 김상현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2011년 이범호선수 입단 이후 3루 포지션을 잃었고 잔부상에 시달리다 2013년 5월 SK에 2:2로 트레이드 되면서 영원한 타이거즈 선수일 것만 같았던 타이거스 27번 김상현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13년 등번호 27번 신승현

 

쌍방울 레이더스 2차 11순위로 지명받은 신승현은 SK 창단멤버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다. 2005년 두각을 나타내며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나 부상과 군입대 등으로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2013년 5월 같은 소속팀인 SK 송은범과 함께 기아 김상현, 진해수와 2:2 트레이드되어 기아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으며 김상현이 사용하던 27번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기아가 FA 이대형을 영입하면서 LG가 그를 보상선수로 지목해 반년만에 또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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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을 시작으로 타이거즈의 강타자를 상징했던 등번호 27번은 故 이호성선수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더이상 강타자 번호로서 위상을 잃었고 김상현이 그 번호를 이어받으며 부활하는 듯 했으나 또다시 주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순탄치 않았던 타이거즈 등번호 27번의 수난을 끓어 줄 또다른 영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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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팀의 주인이 해태에서 KIA로 바뀐지 10년만에 해태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은 검정하의-빨강상의 유니폼을 다시 한번 보게 될줄이야. IMF와 모기업의 부도로 팀의 주인이 바뛰며서 다시는 못 볼줄 알았던 그 유니폼을 티비를 통해 보고 있으니, 시간이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 싶었다.


2.
역시 빨강색은 검정색과 같이 있어야 용맹스런 기운이 더해지는 것 같다. 지금 KIA타이거즈의 원정 상의도 빨간색이긴 하지만, 빨간색 모자와 흰색 바지로 인해 조금 부드러운 빨간색의 느낌이다. 하지만 올드유니폼의 빨간색은 야간조명 아래에서는 정말로 검붉은색을 띄는 것 같다.


3.
모자와 헬멧까지 검정색으로 준비한 걸 보니 KIA프론트가 올드유니폼 데이를 제대로 준비했단 생각이 든다. (엘지트윈스의 올드유니폼데이는 파란색 상의 + 검정빨강 헬맷이라 조금 언발란스 했었다.)
그런데 바지까지 꼭 농군 스타일로 했었어야 했나 싶다. 투지는 있어보였지만 선수들 얇은 다리가 마치 살없는 닭다리 같아서 맵시는 좀 빠져보인다. (특히 이용규) 요즘 유니폼처럼 통바지 스타일로 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이범호, 최희섭, 나지완처럼 한 종아리 하는 선수들은 그나마 농군스타일이 잘 어울림



4.
이참에 팀의 정식 모자 색깔을 검정색으로 바꿨으면 어떨까 싶다. 개인적으로 야구유니폼은 모자, 언더셔츠, 벨트, 스타킹, 스파이크는 한가지 색상으로 통일하는게 가장 보기좋다고 생각한다.

현재 KIA타이거즈는 홈경기에서 빨간색 모자와 빨간색 언더셔츠, 빨간색 벨트, 빨간색 스타킹을 착용하지만 원정경기때는 빨간색 모자와 검정상의, 검정벨트를 착용한다.

검정색 바지를 다시 입을 수 없다면 모자와 언더셔츠만이라도 검정색을 착용해서 현재 조금 부드러운 느낌의 팀 유니폼에 강인함을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5.
유니폼은 무시무시했던 해태타이거즈였지만 경기내용은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중반까지 아슬아슬한 리드, 계속된 찬스의 무산, 경기 후반 불팬의 붕괴, 다잡은 승리의 불발.. 하필 올드유니폼을 입고 이런 답답한 경기를 펼쳤으니 프론트나 선수들 모두 다시는 올드유니폼 데이를 하고 싶어하지 않을것 같다.

더군다나 선두경쟁을 하고 있는 삼성과의 경기였으니 나중에 포스트시즌에서 삼성을 만나기라도 하면 올드유니폼 때문에 괜한 징크스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렇더라도 오늘 KIA의 올드유니폼데이는 올시즌 최대의 볼거리였다. 또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또다시 올드유니폼데이를 한다면 그땐 화끈하게 이겨서 분위기 반전이 필요할때마다 검빨의 기운을 받아보는 좋은 징크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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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주 오랜만에 MBC의 "야구읽어주는 남자"라는 야구프로그램을 봤다. 요즘 야구의 인기가 높다보니 단순히 경기결과를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매거진 형식으로 진행되는 야구프로그램이 많이 생겼고, '야구읽어주는 남자'역시 매거진 성격의 방송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방송 주기가 월단위라 일정등록을 해놔야 챙겨볼 수 있다.

프로그램 말미쯤, 부상이 안타까운 선수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있었는데 박철순, 염종석, 김건우 등 많은 스타들이 거론되었고, 1위는 기아타이거즈의 이대진선수였다.

해태-기아타이거즈의 팬이라면 단연 선동열을 이을 차세대 호랑이 에이스로 이대진선수를 꼽지 않은 팬이 없었을 것이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해태타이거즈 시절의 이대진선수



내가 이대진선수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몇차례의 짧은 만남과 부상이라는 동질감때문이다.

1990년 중반 해태팬클럽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이대진 선수에게 팬클럽회원들의 축전을 전달해 주었었는데 그때 축전의 디지털 편집을 내가 직접 하기도 하였고.. 1997년 해태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때 마스코트 호돌이와 선수로 그라운드에서 악수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호랑이 인형을 쓰고 치어리더 옆에서 흥을 돋우던 호돌이를 했었다. 그때 당시에는 마스코트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기에 아르바이트는 아니었고, 한국시리즈에 맞춘 이벤트성 캐릭터였다.

우승을 앞둔 9회말 2아웃 해태타이거즈의 마지막 수비때 호랑이 탈을 쓰고 덕아웃으로 내려 갔었고, 우승이 확정된 직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갔을 때, 나도 덩달아 뛰쳐나가 뒤엉켜 있으면서도 이대진선수를 향해 내가 먼저 악수를 청했던 기억이 있다.
 
(호랑이 탈을 쓴 마스코드 인형이 선수에게 악수요청을 하고 악수를 하는 장면을 떠오르니 조금 웃긴 것 같다.)

이대진선수는 팬의 입장에서 응원하는 선수이기도 했지만, 그때 사회인야구를 막 시작했던 나에게는 닮고 싶은 선수이기도 했다.

150km/h에 육박하는 돌덩이같은 묵직한 직구로 타자를 윽박지른 후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를 이용해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모습은 내가 바라던 우완 정통파 투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 역시 1996년도에 처음 사회인야구를 시작한 이후 10년 가까이 투수로만 활동했었다. 어깨가 싱싱하던 시절엔 직구 구속이 120km/h정도 나오기도 하였고 하루에 두 게임을 연달아 완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200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한 3개월정도 공을 던지지 않고 쉰 뒤에 이를 악물고 던져야 105km/h를 넘을까 말까한 공을 던질 수 있다.

사회인야구는 프로가 아니기에 투수를 못하면 다른 포지션을 하면 된다. 하지만 투수로서의 로망은 늘 여전하다. 투수가 주는 매력은 다른 포지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으며, 투수의 와인드업으로부터 경기가 시작되고, 타자와 1:1로 맞붙어 싸운다. 양팀 9명의 선수가 대결하는게 야구이지만 타자를 상대로 직접적인 대결을 하는 선수는 오로지 투수뿐이다.

투수는 타자와 물리적인 접촉 없이 대결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는 공에는 그 이상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실어 던져야 한다. 상대방과의 물리적인 접촉을 통해 내가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상대방과 대결해야하는 것이 야구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이유인 것 같다.

타자와의 대결 결과가 어떻든간에 타자와 맞서는 과정 자체가 큰 만족이고 투수라는 포지션이 주는 매력이다.
 
하지만 던지고 싶은대로 던져지지 않을 때 받게되는 상실감과 좌절감은 투수의 매력만큼이나 어마하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긴 세월을 송두리채 날려버릴 수도 있는 심각한 부상이라면 투수에겐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진선수는 이마저도 자신과의 싸움이라 여기고 받아들여 이겨냈고 극복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대진선수의 꿈은 시속 145km이상의 공을 던져보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 왠만한 투수들이 맘먹고 던지면 찍을 수 있는 구속 145km/h..

불같은 강속구로 전인미답의 10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했던 이대진선수였지만 이제는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만큼이나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되어 버렸다.

우완정통파의 교본


마치 번개처럼 달려 연일 100m 세계신기록을 바꾸고 있는 우사인 볼트가 온전히 전력을 다해 100m를 뛰어보는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야구선수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사회인야구를 통해 투수의 매력에 빠져봤던 나 역시, 지금은 어깨 통증으로 온전하게 전력투구를 할 수 없는 입장이 되다보니, 이대진선수의 소원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다가온다.

200승투수였어야 할 100승 투수 이대진 - MBC '야구읽어주는 남자' 中



부상 후 타자전향 시도, 여러 차례의 수술과 기나긴 시간의 재활 등.. 힘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작년에 통산 100승을 기록한 이대진선수, 비록 지금은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것이 소원이 돼버린 130km/h대 평범한 직구를 던지는 기교파 투수가 되었지만, 이대진선수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의 가슴엔 영원히 "Ace of Ace"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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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타이거즈의 1982년 창단 당시 전라북도 도청을 방문하여 찍은 단체사진이라고 합니다.

저 빨간 유니폼때문에 해태라는 팀을 더욱 좋아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어서 참 아쉽네요.

해태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은 빨간장갑의 마술사 故 김동엽 감독님이시죠. 해태의 빨간상의 검정하의 원정유니폼을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하구요.

두번째, 세번째 줄에 서있는 사람들이 선수들인 것 같은데.. 총 17명이네요.

아마 1군에서 뛰었던 선수가 17명이었나 봅니다. 당시 김성한 전 기아타이거즈 감독이 투수와 타자로 활약하며 10승과 3할타율을 기록한 것도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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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라북도 도청 방문하여 찍은 해태타이거즈 선수단 사진


롯데나 두산, SK가 올드유니폼데이를 하는 것을 보면 해태타이거즈의 오랜 팬으로서 어지간히 부러운게 아닙니다.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KIA타이거즈로 이름을 바꾸게 됐을 때, 정말 몇날 몇일을 패닉상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해태타이거즈는 야구팀 이상의 의미였고 해태타이거즈가 없는 프로야구는 생각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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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가능성이 0%에 가깝겠지만.. 가끔은 해태제과가 돈 많이 벌어서 다시 해태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야구단을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해태라는 기업이 좋다기 보다는 '해태타이거즈'라는 야구팀 자체가 제가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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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 선수들을 주눅들게 했던 선동렬

해태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저조차도 그들의 야구에 전율을 느꼈던 적이 많았습니다.

전세계 어느 야구팀 유니폼과 견주어도 강렬함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원정 유니폼!!

해태 원정유니폼의 진가는 야간경기때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둠이 야구장 주변을 뒤덮고, 45도 각도로 비추어진 조명을 받고 있는 녹색 잔디위의 빨간유니폼은 그냥 빨간색이 아닌 검붉은 빨간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니폼의 포스때문이었는지.. 해태타이거즈의 선수들은 맹렬한 전사 그 이상이었죠.

몇점차를 뒤지고 있어도 절대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해태, 해태타이거즈의 경기는 마스코트인 호랑이만큼이나 맹렬하고 야성이 넘쳤죠.

KIA가 타이거즈란 이름을 버리지 않고 유니폼 역시 예전의 빨간색을 지켜주고 있는 것은 매우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순해지고 타이거즈만의 색깔이 다소 약해지기 했죠.

KIA가 해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업이지만.. 해태타이거즈를 기억하는 오랜 팬들을 위해서라도 꼭 해태유니폼데이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가슴에 '해태'라는 글씨를 세기기가 조금 무리라면.. 똑같은 디자인으로 '기아'라고 세겨 넣어서라도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저 빨간색 해태 유니폼만 보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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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에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의 공개수사가 발표되면서 그 유력한 용의자가 이호성 전 해태타이거즈 선수라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졌지요.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기사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 늦게 한강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이호성선수로 밝혀져 또한번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두가 아니기를 바랬던 상황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정쯤.. 사라졌던 일가족으로 추청되는 사체가 전남 화순에서 발견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호성선수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유서를 전달했다고 하니 유서의 내용과 사체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건 경위가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결말일 것 같습니다.

(공범 여부나 배후세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 등 수사결과와 진실이 밝혀지기 전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이나 발언은 삼가를...)

엘리트 코스를 밟아 야구를 했고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졌던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가 왜 이런 충격적인 사건의 중심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는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호성선수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접한게 한 2005년쯤으로 기억되네요. 부동산 관련 사업에 연루되어 사기혐의를 받고 있다는 신문보도였는데.. 함께 일한 일당들이 이호성의 유명세를 팔아 사기를 쳤다는 그런 내용이었지요.

프로야구선수 은퇴 후에 웨딩사업을 하며 해태출신 선수들이 그의 웨딩홀에서 결혼한다는 소식도 자주 접하곤 했었는데.. 한 평생 운동만 했던 사람이 운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니 주변의 유혹과 본인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야구선수로서는 정말 남부럽지 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극적이군요. 자신이 선수로써 쌓은 명성과 명예를 갈고 닦아 야구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살았다면 용의자의 '유류품'이 아닌 야구인으로의 '유품'을 남겼을텐데.. 돈과 욕심, 욕망 앞에서 피땀흘린 40년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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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이호성의 변사체에서 발견된 '유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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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타이거즈"를 어떤 팀으로 기억하시나요?

86년~89년 4년연속 우승 포함.. 통산 9번의 한국시리즈 제패!

김봉연, 김성한, 선동열, 이종범 등 수많은 야구스타 배출!

빨간유니폼의 무등산 호랑이들..

전국에 구름팬을 몰고 다녔던 8~90년대 최고의 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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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KIA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해태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참 많습니다. 26년간의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해태(KIA포함)타이거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많은 기록과 이야기들은 끝이 없을텐데요.. 해태(KIA)가 가지고 있는 많은 기록 중에 해태-KIA 포함 26년의 프로야구 역사상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신인왕"입니다.

<82~07 프로야구 역대 신인왕>
연도 선수 소속 포지션
1982년      
1983년 박종훈 OB 외야수
1984년 윤석환 OB 투수
1985년 이순철 해태 내야수
1986년 김건우 MBC 투수
1987년 이정훈 빙그레 외야수
1988년 이용철 MBC 투수
1989년 박정현 태평양 투수
1990년 김동수 LG 포수
1991년 조규제 쌍방울 투수
1992년 염종석 롯데 투수
1993년 양준혁 삼성 외야수
1994년 유지현 LG 내야수
1995년 이동수 삼성 내야수
1996년 박재홍 현대 외야수
1997년 이병규 LG 외야수
1998년 김수경 현대 투수
1999년 홍성흔 두산 포수
2000년 이승호 SK 투수
2001년 김태균 한화 내야수
2002년 조용준 현대 투수
2003년 이동학 현대 투수
2004년 오재영 현대 투수
2005년 오승환 삼성 투수
2006년 류현진 한화 투수
2007년 임태훈 두산 투수


위의 역대 프로야구 신인왕 명단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KIA를 포함하여 해태 출신의 신인왕은 지금부터 22년전인 1985년 이순철을 끝으로 현재까지 단 한명도 없으며.. 해태(KIA 포함)가 가지고 있는 팀 기록 중 유일하게 하나뿐인 기록입니다.

1985년 신인왕을 수상한 이순철은 최근 MBC ESPN의 야구해설자로 변신하여.. 현장 경험을 살린 감칠맛나는 해설과 인정사정없고 까칠한 비난으로 LG감독으로 있으면서 쌓았던 안좋은 이미지를 나름 개성있는 모습으로 바꾸기도 했는데요..

광주상고를 거쳐 연세대를 졸업한 후 해태에 입단한 첫해에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성적인 99경기 타율 0.304 112안타, 31도루 12홈런을 기록하여 타격 전부분 상위에 랭크되어.. 해태타이거즈에 첫번째 신인왕을 안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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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MVP 김성한과 신인왕 이순철

선수시절 이순철은 그야말로 신인왕 이상으로 화려했습니다. 3루수로 입단했지만.. 한대화선수에 밀려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는데.. 빠른 발과 뛰어난 야구센스로 4차례의 외야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그의 선수시절 동안 팀은 6번 차례나 우승하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종범선수와 만나 비교적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는데요. 팀에서 가장 무서운 선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이순철 선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선수시절 해태의 "군기반장"역할이었다고 합니다.

본인의 성격인지 누구의 지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LG 감독 시절 엄했던 모습과.. 해설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면.. 군기반장 스타일이.. 아마도 본인의 성격인 것으로 보입니다.

해태시절 포수 최해식 선수가 홈으로 달려드는 주자와 부딪치고 엎드려서 아파하자 이순철선수가 외야에서 달려와 최해식 선수를 윽박지르니.. 최해식 선수는 아픔을 무릎쓰고도 9회까지 경기를 마쳤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죠..ㅎㅎ

생각난김에.. 이순철선수에 대해 겪었던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90년대 초반에 잠실 해태경기를 관람하러 갔었는데.. 이순철선수 타석에서 고의사구로 나온 상황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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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시절의 이순철

보통은 고의사구가 나오더라도.. 타자가 타격자세를 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때 이순철선수는 3볼이 되자 방망이를 바닥으로부터 1자로 똑바로 서게 세워놓더니.. 땅바닥을 쳐다보며.. 베팅장갑을 벗더군요-_-;;;;;

베팅게이지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규정위반은 아니었던 것 같고.. 심판도 뭐라하지 않더군요.. 4볼이 되자 1루로 터벅터벅 걸어나갔습니다~ㅎㅎ..

암튼.. 화려한 선수시절에 비해 그의 선수 생활 마지막은 다소 초라했습니다.. 김응용감독과 마찰이 있은 후 1997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쓸쓸히 은퇴하고.. 코치수업을 받은 후 LG에서 코치와 감독을 지내게 됩니다.

해태가 배출한 유일한 신인왕, 해태의 황금기의 중심에 서있던 선수의 은퇴였는데.. 은퇴라도 해태에서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선수입니다.

그동안 해태(KIA)가 신인왕을 한번 밖에 배출하지 못할 정도로 우수한 신인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3년 이종범,  2002년 김진우, 2006년 한기주 등... 입단 당시부터 신인왕 후보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선수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종범은 양준혁에게.. 김진우는 조용준에게.. 그리고 한기주는 류현진에게 밀려.. 일생에 단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신인왕을 놓쳤습니다.

KIA(해태 포함) 출신의 두번째 신인왕 선수는 22년간 나오고 있질 않은데.. 내년시즌에는 나올 수 있을까.. 기대해 봅니다.

2008 시즌에 기대되는 KIA유망주들을 아직 검토해보진 않아서 신인왕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진 않았는데요. 아마도 이 글을 보시는 다른 블로거분이 내년 KIA의 신인선수들 전망에 대해 글을 써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p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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