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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8 기아타이거즈 등번호 27번 잔혹사 6
  2. 2008.03.11 유품 대신 유류품을 남긴 이호성 11
  3. 2008.03.10 이호성, 씁쓸하다. 13

1982년~1988년 등번호 27번 김봉연

 

해태(기아)타이거즈에서 처음으로 등번호 27번을 사용했던 선수는 현재 국제대학교 체육학과 교수인 김봉연교수다. 선수 시절 김봉연은 골프를 연상시키는 어퍼스윙으로 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 홈런 22개를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했다.

 

김준환-김봉연-김성한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일명 "KKK"포로 불리우며 1980년대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김봉연선수에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3년 전반기를 마치고 맞이한 꿀맛같은 휴식일. 친구의 초대로 여수를 방문하던 중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친구의 부인이 사망할 만큼 큰 교통사고였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봉연선수는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으나 안면부위를 크게 다쳐 5시간 동안 무려 300바늘 이상 꼬메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초인적인 의지로 사고 44일만에 경기에 출전하였고, 그 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김봉연선수는 얼굴에 난 수술자국을 감추기 위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등번호 27번은 김봉연교수가 야구를 처음 시작했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달았던 번호로 평소 매우 애착을 가졌던 번호였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번호를 연세대 후배인 故 이호성선수에게 물려 주었다.

 

 

 

 

 

 

 

1990년~2001년 등번호 27번 故 이호성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봉연 선수에 이어 타이거즈의 27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故 이호성 선수이다. 해태시절 4번의 우승을 이끌며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 중 하나였으나, 은퇴 후 계속 된 사업실패와 사기, 채무에 시달리다 2008년 내연녀와 그녀의 딸 등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배를 받던 중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진 생략

 

 

 

 

 

 

2002년~2007년, 2009년 등번호 27번 강철민

 

타이거즈의 27번은 이호성선수 후 처음으로 타자가 아닌 투수에게 부여되었다. 고교시설 조용준과 함께 활약했던 강철민이 그 주인이다. 한양대 재학시절 최우수선수와 MVP를 수상하고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으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까지 해결했던 강철민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금액인 계약금 5억원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던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잦은 부상과 수술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하며, 2009년 LG의 김상현, 박기남과 2:1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LG에서도 어깨통증이 재발되어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해 "사이버 투수"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 그 후 LG에서 방출된 뒤 2012년 테스트를 거쳐 한화이글스에 입단했지만 올해 6월 한화에서도 방출되고 말았다. 화려했던 아마추어시절과 달리 어깨수술과 통증으로 프로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투수이다.

 

 

 

 

 

 

 

2008년 등번호 27번 호세리마

 

강철민에 이어 27번의 등번호를 사용한 타이거즈 선수는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런 쇼맨쉽으로 유명한 "리마타임" 호세 리마이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데뷔하여 휴스턴, LA, 캔자스시티 등에서 활약하며 메이저리그 통산 89승을 거둔 유명 투수였다. 2008년 5월 기아타이거즈의 용병투수로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한 리마는 7월까지 단 2개월 정도  뛰었을뿐이지만,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던 스타였다.

 

기아타이거즈 방출 이후 미국 독립리그 등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갔으나, 2010년 5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그를 기억하는 국내 팬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2009년~2013년 등번호 27번 김상현

 

호세리마 이후 타이거즈의 27번을 받은 선수는 김상현선수다. 2000년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2002년 LG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군 베리본즈"라는 별명이 말해 줄 정도로 장타력과 정확성, 힘은 인정받았으나 1군에서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2009년 FA자격으로 LG로 이적한 정성훈과 포지션이 겹치면서 박기남과 함께 기아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공교롭게도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 될 당시에도 정성훈과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2009년 자신이 입단했던 친정팀 타이거즈로 다시 돌아온 김상현은 2009년 4월 26일 열린 삼성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쏘아올리며 그 해에만 4개의 만루홈런을 터트리며 한 시즌 최다 만루홈런(4개)과 타이를 이루었다. (1999년 박재홍이 기록한 한 시즌 만루홈런 기록과 타이)

 

특히 8월에만 홈런 15개와 타점 38개를 뽑아내며 월간 최다 홈런, 최다 타점과 타이를 기록했고 김상현의 몬스터급 활약 덕분에 그 해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타이거즈는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2009년 기아타이거즈의 우승은 김상현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2011년 이범호선수 입단 이후 3루 포지션을 잃었고 잔부상에 시달리다 2013년 5월 SK에 2:2로 트레이드 되면서 영원한 타이거즈 선수일 것만 같았던 타이거스 27번 김상현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13년 등번호 27번 신승현

 

쌍방울 레이더스 2차 11순위로 지명받은 신승현은 SK 창단멤버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다. 2005년 두각을 나타내며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나 부상과 군입대 등으로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2013년 5월 같은 소속팀인 SK 송은범과 함께 기아 김상현, 진해수와 2:2 트레이드되어 기아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으며 김상현이 사용하던 27번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기아가 FA 이대형을 영입하면서 LG가 그를 보상선수로 지목해 반년만에 또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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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을 시작으로 타이거즈의 강타자를 상징했던 등번호 27번은 故 이호성선수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더이상 강타자 번호로서 위상을 잃었고 김상현이 그 번호를 이어받으며 부활하는 듯 했으나 또다시 주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순탄치 않았던 타이거즈 등번호 27번의 수난을 끓어 줄 또다른 영웅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prek
:

어제 오전에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의 공개수사가 발표되면서 그 유력한 용의자가 이호성 전 해태타이거즈 선수라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졌지요.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기사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 늦게 한강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이호성선수로 밝혀져 또한번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두가 아니기를 바랬던 상황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정쯤.. 사라졌던 일가족으로 추청되는 사체가 전남 화순에서 발견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호성선수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유서를 전달했다고 하니 유서의 내용과 사체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건 경위가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결말일 것 같습니다.

(공범 여부나 배후세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 등 수사결과와 진실이 밝혀지기 전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이나 발언은 삼가를...)

엘리트 코스를 밟아 야구를 했고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졌던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가 왜 이런 충격적인 사건의 중심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는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호성선수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접한게 한 2005년쯤으로 기억되네요. 부동산 관련 사업에 연루되어 사기혐의를 받고 있다는 신문보도였는데.. 함께 일한 일당들이 이호성의 유명세를 팔아 사기를 쳤다는 그런 내용이었지요.

프로야구선수 은퇴 후에 웨딩사업을 하며 해태출신 선수들이 그의 웨딩홀에서 결혼한다는 소식도 자주 접하곤 했었는데.. 한 평생 운동만 했던 사람이 운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니 주변의 유혹과 본인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야구선수로서는 정말 남부럽지 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극적이군요. 자신이 선수로써 쌓은 명성과 명예를 갈고 닦아 야구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살았다면 용의자의 '유류품'이 아닌 야구인으로의 '유품'을 남겼을텐데.. 돈과 욕심, 욕망 앞에서 피땀흘린 40년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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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이호성의 변사체에서 발견된 '유류품'




Posted by p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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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일가족 4명이 20여일째 행방불명이라는 사건보도와 함께 CCTV 장면이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이 좀 충격적이었다.

일가족이 살던 아파트 현관의 CCTV인데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손수레에 대형가방을 차례로 끌고 나오는 장면이다. 보도내용에서는 일가족의 집에서 혈흔이 발견된 점, 연락도 없이 종적을 감춘 점 등을 내세워 납치나 살해됐을 가능성을 얘기하면서, 대형 가방을 끌고 나가는 장면을 접한 네티즌들에게 썸뜩한 상상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내용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유명 야구선수 출신 이모씨라는 것이었는데 오늘 오전에 공개수사가 결정되어 이모씨의 실명이 거론된 마당에 실명을 감출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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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왕조를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인 이호성은 아마때부터 거포로 이름을 날리고.. 1990년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하여 외야 골든글러브 2회수상, 해태타이거즈 주장, 선수협 회장 등을 지낸 해태의 간판타자 중 하나다.

힘이 장사라고 알고 있는데.. 대못을 맨손으로 박는다는 일화는 이미 많이 알고 있을 것 같다.

예전에 TV중계로 해태타이거즈의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우익수를 보던 이호성이 홈송구한 공이 노바운드로 포수 뒤 백넷을 맞추는 것을 보고 정말 힘이 대단한가 보다 느꼈었다. (대략 거리가 80~90미터쯤...)

지금은 기아타이거즈로 이름이 바뀌어 예전의 빨간유니폼을 입은 무적 해태타이거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지만, 해태타이거즈의 팬이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건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에 나의 모든 것을 함께 불살랐다는 자부심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해태타이거즈를 추억하는 많은 팬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해태의 화려했던 시절에 나의 유년기를 보내며 그들의 플레이와 승리에 열광했던 내가 가진 해태타이거즈의 추억과 로망은 내 야구관 그 자체인데 그 중심에 있는 선수 중 한명이 불미스런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란 사실이 참으로 믿기 힘들고 씁쓸하기만 하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모르겠지만 야구를 사랑하고 해태타이거즈를 추억하는 한 팬으로서 용의자, 범죄자 이호성이 아닌 '야구선수' 이호성으로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그리고 실종된 일가족 모두 무사하기를..

Posted by p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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